클로드 모네 (Clade Monet, 1840.11.14~1926.12.5)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해안 도시인 르아브르 (Le Havre)에서 보냈습니다.
소년 모네는 사람의 모습을 재치있게 표현하는 캐리커처 (Caricature)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의 캐리커처 그림은 전시되어 판매가 되었고, 1856년에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프랑스 풍경 화가 외젠 부댕 (Eugene Boudin, 1824.7.12~1898.8.8)에게 야외에서 풍경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1858년, 모네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며, 예술 학교에서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7.10~1903.11.13)를 만납니다.
1860년, 군대에 징집되어 1년간 알제리에서 복무했으며, 1862년에 장티푸스에 걸려 르아브르로 돌아 왔습니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 모네는 샤를 글레르 (Charles Gleyre, 1806.5.2~1874.5.5) 밑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41.2.25~1919.12.3), 알프레드 시슬레 (Alfred Sisley, 1839.10.30~1899.1.29), 프레데릭 바지유 (Frederic Bazille, 1841.12.6~1870.11.28) 등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1865년, 그림 모델인 카미유 동시외 (Camille Doncieux, 1847.1.15~1879.9.5)를 만납니다.
1867년, 모네의 뮤즈이며 애인인 카미유가 그의 첫아들인 장 (Jean Monet, 1867.8.8~1914.2.10)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장이 태어나기 전, 둘의 사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한 모네의 아버지가 경제적인 지원을 중단하고, 모네만 가족이 있는 생타드레스 (Sainte-Adresse)로 이사시킵니다.
1868년, 모네의 후원자인 루이 조아킴 고디베르 (Louis Joachim Gaudibert)가 작품을 의뢰한 덕분에, 모네는 카미유, 장과 함께 에트르타 (Etretat)로 이사합니다.
1869년에는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라 그러누예르 (La Grenouillere)라는 리조트에서 작업했습니다. 아래 두 작품 모두 둘이 같이 앉아서 그린 르누아르의 그림들이 다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870년 6월 28일, 모네는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보불전쟁) 징집을 피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도망갑니다. 여기서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 1775.4.23~1851.12.19)와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 1776.6.11~1837.3.31) 등의 영국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연구하여, 명쾌하고 밝은 색채표현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나자, 런던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그림 여행을 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모네는 파리 근교의 아르자퇴유 (Argenteuil)에 집을 구하고, 센 강 (Seine River) 주변을 주로 그립니다.
1874년에 에드가 드가 (Edgar De Gas, 1834.7.19~1917.9.27),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7.10~1903.11.13),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41.2.25~1919.12.3) 등과 함께 사진사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열어,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rise, 1872년)' 등을 전시했습니다. 이 작품을 본 미술평론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그림은 벽지보다 못 그렸고, 모네의 그림은 형태가 분명하지 않아서 그저 인상만 남는다.'라고 혹평을 하며, 모네를 비롯한 전시회에 참가한 화가들을 인상주의자들이라 조롱했는데,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은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이 마을에 들어서 스스로 인상주의자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1877년에 열린 세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첫 연작 시리즈인 '생 라자르 역 (Gare Saint-Lazare)'을 선보이는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습니다.
1878년, 이미 심각한 병에 걸렸던 카미유는 둘째 아들 미셸 (Michel Monet, 1878.3.17~1966.2.3)을 낳았습니다. 카미유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가을에 베퇴유 (Vétheuil)로 이사했습니다. 모네의 후원자였던 에르네스트 오셰데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하고, 잠적하자, 에르네스트의 아내인 앨리스를 비롯한 여섯 자녀들은 모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1879년 9월 5일, 모네의 뮤즈이자 아내인 카미유 (Camille Doncieux, 1847.1.15~1879.9.5)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1883년,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정원이 있는 집을 빌려서 이사했고,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넓어진 작업실과 지베르니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모네의 작품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고, 작품이 판매되면서 모네는 재산이 늘어나게 됩니다. 르누아르와 마르세유에서 제노바까지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기도 합니다.
1884년에는 이탈리아 보르디게라 (Bordighera), 모나코 (Monaco) 등 지중해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1890년, 모네는 세들어 살던 지베르니의 집을 구입합니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지베르니에 집을 사겠다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후, 모네는 건물과 정원을 꾸준히 늘려 나갔으며, 6명의 정원사를 고용하여 정원을 자신의 영감의 원천으로 꾸며 나갔습니다.
1890년 이후로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는데, 1890~91년에는 '건초 더미' 연작을 그렸습니다.
1891년에 에르네스트 오셰데가 사망하자, 1892년에 모네는 에르네스트의 아내였던 앨리스 (Alice Raingo Hoschede, 1844.2.19~1911.5.19)와 결혼합니다. '포플러' 연작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892~94년에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렸습니다.
1896~97년에는 '센 강의 아침' 연작을 그렸습니다.
1897년부터 모네는 그의 미술 인생에서 가장 야심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모네 그림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입니다.
1899~1900년에는 일본 다리를 배경으로 한 '수련' 연작을 그렸습니다.
1899년부터 1904년사이에 런던을 몇차례 방문하여 '채링 크로스 다리 (Charing Cross Bridge)' 연작 34점, '국회 의사당 (The Houses of Parliament)' 연작 19점, '워털루 다리 (Waterloo Bridge)' 연작 41점 등을 그렸습니다.
1903년부터는 배경을 제거하고, 수면 위의 수련과 수면에 비친 나무와 하늘을 그린 '수련' 연작을 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1908년에는 모네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베니스에서 작품을 그렸습니다.
1911년, 두번째 아내인 앨리스 (Alice Raingo Hoschede, 1844.2.19~1911.5.19)가 사망합니다.
1913년, 모네는 백내장의 증상이 나타나자, 런던에서 안과 의사를 만나지만, 오른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거부합니다.
1914년에는 모네가 가장 사랑한, 장남인 장 (Jean Monet, 1867.8.8~1914.2.10)이 사망합니다. 앨리스와 장의 죽음으로 모네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이후에 대형 크기의 '수련' 연작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1918년, 대형 '수련'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여, 모네 사망후 오랑주리 미술관에 영구전시됩니다.
모네의 백내장이 악화되어 시력이 약해진 1910년대 후반 이후 작품들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결국 1923년에 모네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수술 전에 그린 작품 중 일부를 폐기합니다.
1926년 12월 5일, 86세의 모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1966년에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은 모네의 집과 정원을 프랑스 미술원에 기증하였고, 복원한 집과 정원은 1980년부터 대중에게 공개되어 지베르니의 관광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