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7월 4일 독립기념일의 보스톤 프리덤 트레일 후기입니다.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마침 7월 4일에 보스톤을 방문하게 되어 오랫만에 프리덤 트레일 (Freedom Trail)을 걸어보았습니다. 날이 날인지라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이 보통 때보다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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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길'이라는 뜻의 프리덤 트레일 (Freedom Trail)은 미국 독립과 관련된 사적들을 돌아보는 역사 도보 코스로 보스톤 여행의 핵심 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스톤 커먼을 시작으로 인도에 만들어진 붉은 벽돌 안내선을 따라 걸으며, 미국 독립전쟁과 관련된 사적뿐만 아니라 보스톤의 역사적인 명소들을 본인의 컨디션에 따라 여유있게 다녀보는 코스인데, 약 5km의 코스에 16개의 사적들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 안내선만 따라가면 길 찾기도 쉽고, 헤맬 일도 거의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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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톤 커먼에 있는 비지터 센터 (https://www.google.com/maps/place/Boston+Common+Visitors+Center/@42.3554551,-71.0645113,184m/data=!3m2!1e3!4b1!4m6!3m5!1s0x89e3786b60ef7a17:0xdd340f6f890885f3!8m2!3d42.3554551!4d-71.0638676!16s%2Fg%2F1hc6fr2s9?entry=ttu&g_ep=EgoyMDI1MDcwNy4wIKXMDSoASAFQAw%3D%3D)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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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스톤 커먼 (Boston Com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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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 다운타운의 중심에 위치한 보스톤 커먼 (공유지, 공원)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1634년부터 1830년까지 소를 방목한 공유지였는데, 때때로 군사 훈련장, 처형장, 공공 집회장 등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830년대에 나무를 심고, 분수와 조각상 등을 세워 공공 공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잘 가꾸어진 수목과 잔디, 그리고 평화로운 호수가 어우러져 있고,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시민들에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파크 스트리트 교회를 비롯해 공원 주변을 고층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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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1768년부터 1775년 4월에 렉싱턴과 콩코드로 진군하기 전까지 주둔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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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스트리트 (Park Street) 지하철 역과 가까운 보스톤 커먼 비지터 센터에서는 기념품을 사거나, 영어 가이드 워킹 투어 티켓 등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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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보스톤 커먼을 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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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의사당 (Massachusetts Stat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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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돔이 눈길을 끄는 매사추세츠 주의사당은 보스톤 커먼의 북쪽, 비콘 힐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찰스 불핀치 (Charles Bulfinch, 1763.8..8~1844.4.15)가 설계하여, 179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 중 하나로 찬사를 받았으며, 지은지 200년이 넘었지만, 현재까지도 매사추세츠 주의 주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돔은 원래 하얀색 나무 판자로 덮여 있었는데, 1802년에 폴 리비어의 회사 (Revere Copper Company)가 구리로 덮었으며, 1874년에 처음으로 금박으로 도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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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불핀치는 1818년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 의해 제 3대 국회의사당 건축가로 임명되어, 1812년 영미 전쟁으로 화재 피해을 입은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복구하고, 그때까지 건설되지 못한 돔을 가진 중앙건물을 1826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후, 연방에 속하는 주들이 늘어남에 따라 1850년에 국회의사당을 확장하기로 결정하였고, 찰스 불핀치가 세운 돔은 너무 낮고 왜소해 보이는 등 비례가 맞지 않아, 지금의 돔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지금은 돔은 남북전쟁을 거치며, 186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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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당 내부에는 독립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과 '플리머스 식민지사' 등의 주요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지난번 제 보스톤 여행기 (2025년 5월 27일 화요일 (보스톤 시내, 집으로...) : 네이버 카페)에서 소개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진행하는 무료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려 했는데, 방문한 날이 공휴일이기 때문에 주의사당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투어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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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크 스트리트 교회 (Park Stree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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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6m의 하얀 팔각 첨탑이 인상적인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1847년까지 미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스톤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 온 곳입니다.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1809년에 당시 보스톤 지역의 대세인 유니테리언 (Unitarian,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단일성을 믿는 것으로, 성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 교회를 거부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교회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의 주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1812년 영미 전쟁 당시에는 지하실에 화약을 저장하였고, 1829년에는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William Lloyd Garrison, 1805.12.10~1879.5.24)이 미국 최초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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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는 원래 1729년에 지어진 곡물 저장고 (Granary) 건물이 있었는데, 1809년에 곡물 저장고 건물을 보스톤 남쪽의 도체스터 (Dorchester)로 옮기고, 이 땅을 매입하여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1797년에 이 곡물 저장고에서 나중에 소개할 USS 콘스티튜션 (Constitution) 호의 돛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대한 돛을 만들 유일한 장소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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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너리 묘지 (Granary Burying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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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설명했던 곡물 저장고 옆에 있어서 곡물 저장고 묘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 초대 주지사였던 존 핸콕 (John Hancock, 1737.1.23~1793.10.8), 독립전쟁을 선동했던 새뮤얼 아담스 (Samuel Adams, 1722.9.27~1803.10.2),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폴 리비어 (Paul Revere, 1735.1.1~1818.5.10)를 비롯해 1770년에 일어났던 보스턴 학살 사건의 희생자 5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뒤에 자세하게 소개할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17~1790.4.17)의 부모님 무덤도 이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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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묘지의 중앙에 프랭클린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버지, 조사이어 프랭클린 (Josiah Franklin, 1657.12.23~1745.1.16)과 어머니, 아바야 폴저 (Abiah Folger, 1667.8.15~1752.5.18)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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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이동하면 묘지 끝에 존 핸콕 (John Hancock, 1737.1.23~1793.10.8) 기념물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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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에 보스톤 남쪽에 있는 브레인트리 (Braintree)에서 태어난 존 핸콕은 하버드를 졸업하고, 삼촌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삼촌이 사망하자 삼촌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무역으로 돈을 벌던 존 핸콕은 영국의 세금 정책에 반감을 가지며, 1765년에 정계에 입문하여 새뮤얼 아담스와 함께 급진파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는 대륙회의 매사추세츠 주 대표가 되어 제 4대 대륙회의 의장 (1775.5.24~1777.10.31)과 제 7대 대륙회의 의장 (1785.11.23~1786.6.5)이 되었으며, 미국이 독립한 이후에 제 1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1780.10.25~1785.1.29)와 제 3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1787.5.30~1793.10.8)가 되었는데, 주지사 재임 기간 중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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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을 알리는 독립선언서 (Declaration of Independence)가 1776년 7월 4일에 대륙회의에서 발표되었는데, 당시 대륙회의의 의장이었던 존 핸콕은 이 문서에 가장 먼저 서명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서 중앙에 확연하게 크고 굵은 글씨로 서명했기 때문에, 존 핸콕 (John Hancock)이란 단어는 자필 서명을 뜻하는 관용어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문) Put your John Hancock on this check.

The President has to put his John Hanc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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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원본이 아닌 기념품입니다.원본은 잘못된 보관으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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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문서 박물관 (National Archives Museum)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 뿐만 아니라, 미국 헌법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과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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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문서 박물관 내부...)

(국립 문서 박물관에 전시된 독립선언서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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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국의 역사도 승리한 자들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흔히 배워서 알고 있는 미국의 역사는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흔한 오류의 역사는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미국 원주민과 관련된 역사이고, 독립전쟁과 관련된 역사도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정확한 역사를 알기 힘들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미국의 역사는 제 나름대로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정리한 미국의 역사이니, 혹 알고 계시는 것과 다르더라도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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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대부터 생겨난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본인들이 영국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영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식민지 자체의 법과 정치를 만들어, 자치 권한을 가진 그들만의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인 7년 전쟁 (북미 대륙에서는 프렌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 1754.5.28~1763.10.7)이 있었습니다.)이 끝난 후 막대한 빚에 시달린 영국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764년부터 미국 땅에 있는 13개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1764년 설탕 조례 (Sugar Act), 1765년 인지 조례 (Stamp Act), 1767년 타운센드 법 (Townshend Acts), 1773년 차 조례 (Tea Act) 등 일련의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1764년에 제정된 설탕 조례는 보스톤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식민지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새뮤얼 아담스 (Samuel Adams, 1722.9.27~1803.10.2)와 제임스 오티스 (James Otis, 1725.2.5~1783.5.23) 등은 식민지 사람들의 대표가 없는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식민지 의회만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765년에 제정된 인지 조례가 자신의 무역 사업에도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한 존 핸콕은 법시행에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지 조례는 벤저민 프랭클린에 의해 1766년에 폐지되었고, 1767년에 영국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 (Charles Townshend, 1725.8.28~1767.9.4)의 주도로 이루어진 타운젠드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안은 수입품에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고, 밀수를 방지하기 위한 미국 관세청을 설립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이에 존 핸콕은 영국산 수입품 불매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로 인해 관세청의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1768년, 식민지인들의 영국에 대한 비협조를 촉구하는 매사추세츠 회람 서한 (Massachusetts Circular Letter)이 새뮤얼 아담스 주도로 작성되었고, 이로 인해, 영국은 보스톤으로 영국군 4개 연대를 파견하였는데, 1770년 3월에 보스톤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 등은 협상을 통해 영국군 2개 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또한, 타운젠드 법이 부분적으로 폐지되었고, 새뮤얼 아담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 핸콕의 주도로 영국산 수입품 불매 운동도 끝났습니다. 하지만, 1773년에 차 조례 (Tea Act)가 제정되자, 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판매되는 차 (Tea)는 영국 동인도회사를 통하면 엄청난 세금이 붙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쳐 밀수된 차는 세금이 없었기에 저렴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재고를 떠안게 되었고, 영국 정부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가 미국 식민지에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할 수 있는 차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미국 식민지에서는 중국에서 세금이 없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쳐 밀수업자들이 엄청난 이윤을 붙여 차를 들여왔는데, 차 조례가 실행되면서 중국에서 영국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미국 식민지로 들어온 차는 비록 세금이 붙었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직접 미국 식민지에 차를 판매하는 정책으로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자, 차값이 기존의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손해를 본 밀수업자들과 그들의 돈으로 지탱하고 있던 일부 과격 지식인들이 반발하여 차값이 올랐다며 대중들을 거짓 선동하였고, 결국은 1743년 12월 16일 저녁, 그 유명한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이 발생하게 됩니다. 밀수업자 중에는 존 핸콕이 포함되었다는 얘기가 있으며, 과격 지식인은 새뮤얼 아담스 등이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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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폴 리비어 (Paul Revere, 1735.1.1~1818.5.10)의 무덤을 찾아가 봅니다. 그래너리 묘지에 묻힌 인물들의 무덤 위치는 구글맵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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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비어는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그에 대한 설명은 뒤에 그와 관련된 다른 사적에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의 기념물과 묘비 사이에 있는 원형 동판은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 주동자들을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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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새뮤얼 아담스 (Samuel Adams, 1722.9.27~1803.10.2)의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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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 보스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새뮤얼 아담스는 하버드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일을 잘 하지 못 해 그마저도 얼마 하지 못 했습니다. 경제 관념은 없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토론하기 좋아했던 새뮤얼 아담스는 아버지를 따라 정치에 입문하였고, 존 핸콕과 함께 대륙회의 매사추세츠 주 대표가 되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였으며, 미국 독립 이후에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및 4대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새뮤얼 아담스는 건국의 아버지로 큰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으나, 요즘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폭력을 이용한 선동가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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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 (John Adams, 1735.10.30~1826.7.4)와는 사촌지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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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스톤을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도 '새뮤얼 아담스 (Samuel Adams)'인데, 새뮤얼 아담스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맥아 제조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물론,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의 명성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새뮤얼 아담스가 일했던 맥아 제조소는 그의 잘못으로 망했습니다. 뒤에서 방문할 파뉴일 홀 (Faneuil Hall) 옆에는 새뮤얼 아담스 맥주 매장 (https://www.google.com/maps/place/Sam+Adams+Downtown+Boston+Taproom/@42.3593837,-71.0565553,184m/data=!3m1!1e3!4m6!3m5!1s0x89e371001dbc696d:0x678ec4e9bbc6009b!8m2!3d42.3597718!4d-71.0565441!16s%2Fg%2F11j36pstz7?entry=ttu&g_ep=EgoyMDI1MDcwNy4wIKXMDSoASAFQAw%3D%3D)이 있으니, 프리덤 트레일 도중에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방문하셔도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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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아담스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고,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 보스톤 학살의 희생자 묘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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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구경해도 되는데, 한명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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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던 제임스 오티스 (James Otis, 1725.2.5~1783.5.23)의 무덤도 이곳에 있는데, 그는 존 핸콕, 새뮤얼 아담스와 같이 활동한 정치가였으며, 식민지 사람들의 대표가 없는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식민지 의회만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표자 없는 과세는 폭정이다.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is tyranny.)"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보스톤 사람들사이에서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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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킹스 채플 & 킹스 채플 묘지 (King's Chapel & King's Chapel Burying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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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채플은 1686년에 설립된 보스톤 최초의 영국 성공회 교회로 지금의 건물은 1754년에 완공된 것입니다. 설립 당시 영국 성공회를 피해 미국으로 온 청교도 보스톤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독립 후에는 미국 최초의 유니테리언 교회가 되었는데, 유니테리언 (Unitarian)에 대해서는 앞에서 파크 스트리트 교회를 소개할 때 설명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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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채플은 다른 교회들과 달리 첨탑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원래는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완성되지 못 했습니다. 기둥 또한 비용 문제때문에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돌처럼 보이도록 페인트칠을 해 놓았습니다. 지나가면서 한번 두드려 보세요. 내부의 신자석은 기차 또는 마차 좌석처럼 마주보고 앉는 특이한 방식인데, 내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 5달러를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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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이는 모든 기둥들이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꼭 두드려 보세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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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옆에 있지만, 교회보다 먼저인 1630년에 설립된 보스톤 최초의 묘지인 킹스 채플 묘지에는 식민지 최초의 주지사였던 존 윈스롭 (John Winthrop, 1588.1.12~1649.3.26)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한, 폴 리비어와 함께 영국군의 이동을 알리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던 윌리엄 도스 (William Dawes, 1745.4.6~1799.2.25)의 무덤도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주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 찰스 불핀치 (Charles Bulfinch, 1763.8..8~1844.4.15)도 이곳에 묻혔었는데, 지금은 다른 묘지로 이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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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 존 윈스롭 (John Winthrop)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가운데 푸른 동판이 있는 무덤이 윌리엄 도스 (William Dawes)의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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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스톤 라틴 스쿨 & 벤저민 프랭클린 동상 (Boston Latin School & Benjamin Franklin Sta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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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에 미국 최초로 세워진 공립 학교인 보스톤 라틴 스쿨은 1745년에 킹스 채플의 확장으로 근교인 펜웨이 (Fenway) 부근으로 이전했고,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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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에 보스턴에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17~1790.4.17)은 집안 형편상 보스톤 라틴 스쿨을 2년간 다니다가, 10세에 중퇴하여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84세까지 살면서 미국 최고의 과학자, 발명가, 정치가, 외교관, 저술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했습니다.

학업을 중단한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양초, 비누 제조업을 돕다가,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했으나, 형과의 불화와 형의 모함으로 17세에 무일푼으로 필라델피아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인쇄 기술을 가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쇄소를 차려서 성공하게 되고, 나중에 인수한 신문사도 성공하였습니다. 큰 돈을 벌게 된 벤저민 프랭클린은 1731년에는 미국 동부 8개 명문 사립대학 모임인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 1740년 개교, 흔히 유펜 (UPenn)으로 불림.)의 전신인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유펜 발전에 기여하는 등 교육 활동에 참여합니다. 1748년부터는 회사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월급을 받으며 과학 연구에 집중합니다. 현재까지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난로를 발명했으며, 1752년에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연 날리기 실험 등을 통해, 그의 발명 업적 중 최고인 피뢰침 발명했습니다. 또한, 다초점 렌즈도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입니다.

1751년에 펜실베이니아 하원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건 미국의 독립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영국으로 건너가 1766년에 영국 상인들과 의회를 설득하여 인지 조례를 철폐시켰으며, 1775년 대륙회의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로 뽑혀, 1776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토머스 제퍼슨 (1743.4.13~1826.7.4, 제 3대 미국 대통령)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또한, 1776년부터 1785년까지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1778년에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켜 독립전쟁을 위한 프랑스의 재정 원조와 군사 원조를 유도하는데 성공했고, 공식적인 미국 독립전쟁의 끝을 의미하는 1783년 파리 조약 미국 대표 3인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1735.10.30~1826.7.4, 제 2대 미국 대통령), 존 제이 (제가 썼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작품 요약 (개정판, 이집트관)에서 잠시 소개했습니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립 후에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1776년 독립선언서, 1778년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 1783년 영국과의 파리 조약, 1787년 미국 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런 위대한 업적으로 인해 그는 미국 100달러 지폐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고향이자, 그가 다녔던 라틴 스쿨 자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필라델피아에도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그의 무덤은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 (Independence Visitor Center) 근처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 묘지 (Christ Church Burial Ground)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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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외에도 새뮤얼 아담스, 존 핸콕, 찰스 불핀치 역시 보스톤 라틴 스쿨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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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상 앞에 있는 담장 너머 (즉,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인도 바닥에는 보스톤 라틴 스쿨 (Boston Latin School)의 자리를 보다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1983년에 릴리 앤 킬렌 로젠버그 (Lilli Ann Killen Rosenberg, 1924.7.22~2011.7.19)가 '시티 카펫 (City Carpet)'이라는 이름으로 제작한 사방치기 (Hopscotch) 모자이크 작품이 있습니다. 사방치기 놀이판의 각 칸에는 다양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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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올드 코너 서점 (Old Corner Book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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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높이의 붉은 벽돌 건물인 올드 코너 서점 건물은 1718년에 약국으로 사용하기 위해 처음 지었는데, 약국과 주거용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거의 백년동안 약국으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보스톤에서 가장 오랜된 상업 건물입니다. 같은 자리에는 원래 1638년에 지어진 주택이 있었는데, 1711년 10월 2일 보스톤 대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1828년 공사를 통해 1층에 돌출형 창문을 설치하였고, 옆으로 3층짜리 건물 2채가 추가되었습니다. 서점으로 이용된 건 1828년부터이며, 1903년까지 여러 출판사들이 거쳐 가며 호황을 누렸는데, 가장 번성했던 때는 당대 최대 출판사 중 하나였던 티크너 앤 필즈 (Ticknor and Fields)가 자리하던 1800년대 중반 (1832~1865년)으로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5.25~1882.4.27),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7.4~1864.5.19),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2.27~1882.3.24),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 1812.2.7~1870.6.9),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7.12~862.5.6) 등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올드 코너 서점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1960년에 철거될 뻔한 이 건물은 비영리 단체인 히스토릭 보스톤 (Historic Boston)에 의해 보존되었고, 1982년부터 1997년까지 글로브 코너 서점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보스턴 그로브사의 직영 서점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울트라 다이아몬드가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치폴레 (Chipotle) 멕시칸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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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5.25~1882.4.27)은 보스톤에서 태어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보스톤 라틴 스쿨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였기에 하버드 신학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교회와의 갈등으로 사임하였습니다. 그후 3년간의 유럽생활을 통해 자연주의 철학자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다양한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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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7.4~1864.5.19)은 미국의 소설가이며 외교관입니다. 평범한 삶은 살았던 호손의 주요 작품은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1850년)'와 '큰바위 얼굴 (The Great Stone Face, 1850년)' 등이 있습니다. 대학 친구인 제 14대 미국 대통령 (1853.3.4~1857.3.4)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1804.11.23~1869.10.8) 덕분에 리버풀 영사로 재임했으며, 1857년 8월에 영사직을 사임한 후에는 3년동안 유럽 여행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860년 5월에 친구인 프랭클린 피어스와 여행 도중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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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2.27~1882.3.24)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번역가입니다. 미국 메인 주에 있는 보도인 칼리지 (Bowdoin College)에서 평생 친구인 너새니얼 호손을 만났습니다. 물론, 프랭클린 피어스도 이 대학 출신입니다. 보도인 칼리지 졸업후 그 곳의 교수가 되어 유럽 여행을 했으며, 그 후에 다시 유럽 연수 후, 하버드 교수가 되어 평생 캠브리지에서 살았습니다. 결혼 후 그가 평생 살았던 집은 현재 국립공원 관리청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근처 (https://www.google.com/maps/place/Longfellow+House-Washington's+Headquarters+National+Historic+Site/@42.380121,-71.1261492,14.54z/data=!4m6!3m5!1s0x89e3776937c1f5f3:0x43c94658ba8a5a07!8m2!3d42.3769885!4d-71.1263695!16zL20vMDZ3MDdf?entry=ttu&g_ep=EgoyMDI1MDcwNy4wIKXMDSoASAFQAw%3D%3D)에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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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 1812.2.7~1870.6.9)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 비평가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힘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 1837년)',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 1843년)', '데이비드 코퍼필드 (David Copperfield, 1849년)',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1861년)' 등은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1842년과 1867년에 미국을 방문하였고, 롱펠로우, 마크 트웨인과 같은 미국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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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7.12~862.5.6)는 미국의 시인, 수필가이며 철학자인데, 에머슨 등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월든 (Walden, 1854년)'의 배경인 월든 호수 (https://www.google.com/maps/place/Walden+Pond/@42.439277,-71.3449676,16z/data=!3m1!4b1!4m6!3m5!1s0x89e39a55c20e30eb:0x3e12ee9ae423ebc!8m2!3d42.4387018!4d-71.3401284!16zL20vMDJsemZ4?entry=ttu&g_ep=EgoyMDI1MDcwNy4wIKXMDSoASAFQAw%3D%3D)가 보스톤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으니, 렌트카가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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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폴레가 있는 매장은 예전 (2007년)에는 다이아몬드 상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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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올드 사우스 집회소 (Old South Meet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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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 청교도의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설립했으나, 이후 보스톤 사람들의 집회소로 자주 이용되었는데, 식민지 시절 영국 정부의 과세에 분개한 보스톤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 그 시작입니다. 당시 보스톤에서 가장 큰 집회 공간이었기에 1773년 11월 29일에 파뉴일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차 조례 (Tea Act) 관련 집회에 수천명이 모인 관계로 이 곳으로 옮겨 진행되었으며, 12월 16일에 있었던 새뮤얼 아담스의 연설로 인해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이 일어나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지금도 매년 12월 16일에 그 당시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사건 이후, 영국군은 올드 사우스 집회소에 있던 의자를 모두 철거하고, 이 곳을 마굿간으로 만들었으며, 그중 일부를 돼지 우리로 사용하여 보복했습니다. 1872년 보스톤 대화재 때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복원되어 현재는 미국 독립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며, 입장료는 10달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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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 주의사당 (Old Stat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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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 사이에 위치한 붉은 벽돌의 건물인 구 주의사당은 1776년 독립선언서가 보스톤 사람들에게 처음 낭독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1713년 지어진 옛 주의사당 건물은 1748년 화재로 폐허가 된 후 다시 지어졌는데, 현재는 독립전쟁 당시의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12달러인데, 앞에서 소개한 올드 사우스 집회소와 함께 입장할 수 있는 15달러 통합권을 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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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주의사당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다음에 설명할 보스톤 학살 유적지입니다. 실제 사건은 제가 사진을 찍은 도로쪽에서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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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스톤 학살 유적지 (Boston Massacre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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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3월 5일, 영국의 조세 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3~4백명의 보스톤 사람들 (정확하게는 월급이 적었던 영국군들이 부업으로 노동일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일자리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것에 불만을 가졌던 노동자들)과 9명의 영국군 간의 우발적인 사건때문에 위협을 느낀 영국군들이 상관의 명령없이 총을 쏘아 시민 5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 곳으로 구 주의사당 바로 앞 인도 위에 위치를 원형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새뮤얼 아담스는 이 사건을 보스톤 대학살이라고 공표하고, 연일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의 장례식에 1만명 (당시 보스톤 인구가 12,000명)이 참석할 정도로 사회적인 관심과 파장이 커졌으며,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에 영향을 주어 독립전쟁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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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학살이라고 하면 무자비한 대량 살인을 의미하는데, 이 사건은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미국 백인들이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 다코타 주의 운디드 니 (Wounded Knee)에서 남자 90명, 여자, 아이 200명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 300명을 죽이고, 50명이 부상당한 사건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전투 (Battle) 또는 재앙 (Disaster)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최근에야 학살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는 철저히 백인들의 입장에서 포장된 역사이므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역사를 알게 되면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즉, 보스톤 학살은 학살이 아니라 충돌이나 사고라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역시나, 영국에서는 '킹 스트리트의 사건 (Incident of King Street)'이라고 한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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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앞에서 언급했던 폴 리비어 (Paul Revere, 1735.1.1~1818.5.10)가 제작한 판화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이 판화를 보면 영국군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듯 일방적으로 시민들에게 총을 쏜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사실은 폭언을 하며, 몽둥이, 돌멩이, 눈덩이 등을 던지는 시민들의 폭동과 같은 상황에서 위협을 느낀 영국군이 지휘관의 명령없이 한 대응 (또는, 근처에 발생한 불로 인해 누군가 "Fire!" 라고 외쳤고, 이를 들은 영국군이 실수로 발포했다는 설도 있습니다.)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열린 재판에서 밝혀졌으며, 당시 영군국들은 1명의 장교와 6명의 군인은 무죄, 2명의 군인은 집행유예와 같은 가벼운 처벌만 받았습니다. 영국군의 변호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며, 제 2대 미국 대통령인 존 아담스 (John Adams, 1735.10.30~1826.7.4)였는데, 그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부정적 입장이었지만, 공정한 재판을 위해 변호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존 아담스에게 변호를 부탁한 것은 새뮤얼 아담스라니, 재판 후에 새뮤얼 아담스는 후회를 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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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판화는 원래 헨리 펠햄 (Henry Pelham, 1748.2.14~1806, 미국의 유명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 (John Singleton Copley, 1738.7.3~1815.9.9,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작품 요약 (개정판, 미국관))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만든 판화였으나, 헨리 펠햄의 허락도 없이 폴 리비어가 무단 도용하여 여러 지역으로 배포하였습니다. 폴 리비어는 더 자극적인 효과를 위해 영국군의 붉은 코트와 시민들의 붉은 피를 강조하여 채색하였으며, 건물 (오른쪽 Butcher's Hall 창문)에서도 총을 쏘는 모습을 추가하였는데, 선동의 목적으로 13개 식민지 지역에 보급하여, 영국군과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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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퍼 온 폴 리비어의 판화.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6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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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파뉴일 홀 (Faneuil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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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시 마켓 바로 앞에 자리한 파뉴일 홀은 대서양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던 피터 파뉴일 (Peter Faneuil, 1700.6.20~1743.3.3)이 1742년에 지어 보스톤 시에 기증한 건물로, 1층은 1742년부터 지금까지 상가로 쓰였으며, 2층에 있는 회의장에서는 처음에는 지역 문제를 논의하는 마을 회의가 있었지만, 1760년대부터 영국의 세금 문제에 대해 새뮤얼 아담스와 제임스 오티스 등이 미국이 독립할 때까지 수차례 연설을 했던 집회 장소로 이용되며, '자유의 요람 (Cradle of Liberty)'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742년에는 2층 건물이었는데, 1806년에 찰스 불핀치에 의해 높이와 넓이가 확장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현재 1층은 상가, 2층은 그레이트 홀 (Great Hall), 3층은 갤러리, 4층은 포병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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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뉴일 홀 앞에는 새뮤얼 아담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1층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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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상가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있는 그레이트 홀 (Great Hall)에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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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홀에 걸려있는 거대한 그림은 미국의 초상화가인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 (George Peter Alexander Healy, 1813.7.15~1894.6.24)가 1843년부터 1850년까지 그린 작품으로,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대니얼 웹스터 (Daniel Webster, 1782.1.18~1852.10.24,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가 1830년 1월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상원의원 로버트 Y. 헤인 (Robert Y. Hayne, 1791.11.10~1839.9.24, 가운데 손을 모으고 앉아있는 사람)과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토론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상원의장은 제 7대 부통령 존 C. 캘훈 (John C. Calhoun, 1782.3.18~1850.3.31)입니다. 미국은 부통령이 상원의장도 같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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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 (George Peter Alexander Healy, 1813.7.15~1894.6.24)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초상화가로,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 (National Portrait Gallery)을 방문하면, 그가 그린 6명의 대통령 초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정치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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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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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층에 위치한 포병 박물관입니다. 포병 박물관을 관리하는 포병 중대 본부는 1746년부터 파뉴일 홀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고, 다양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땀도 식힐 겸 가볍게 보고 가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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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창문을 통해 본 퀸시 마켓 지역...)

(건물 위에는 무게 36kg, 길이 1.2m의 금박 메뚜기 풍향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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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뉴일 홀 바로 뒤에는 1822년에 파뉴일 홀의 상업 공간 부족으로 18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26년에 완공된 퀸시 마켓 (Quincy Market)이 있습니다. 파뉴일 홀과 퀸시 마켓 사이의 광장에서는 주말마다 거리 공연이 열리고, 퀸시 마켓 안에는 다양한 상점과 음식점들이 있습니다. 맛집들이 많이 있으니, 일정에 따라 이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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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시 마켓을 구경하면 프리덤 트레일을 잠시 벗어난 것입니다. 다시 파뉴일 홀로 가서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갑니다.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가다 보면 지난번 제 보스톤 여행기에서 소개한 유니언 오이스터 하우스가 나옵니다. 여기서 점심 식사를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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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프리덤 트레일이 보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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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언 오이스터 하우스를 지나면 Haymarket이 나옵니다. 여기도 주말에 열리는 시장인데, 오늘도 열렸네요. 가격이 저렴하니, 구경하시면서 맛있는 과일 사 드세요. 저희도 체리 사 먹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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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난번 제 보스톤 여행기에서 소개했던 그린웨이를 건너가야 하는데, 그린웨이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인 North Canal Fountain을 지나갑니다. 오늘도 아이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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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폴 리비어 하우스 (The Paul Rever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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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비어 하우스는 168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스톤 다운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2층 목조 주택으로, 1770년에 폴 리비어가 구입해 1800년까지 소유했다고 하며, 1902년에 폴 리비어의 증손자가 건물의 파손을 막기 위해 매입하면서 현재까지 18세기 목조 주택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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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의 진격을 알리기 위해 폴 리비어가 출발했다고 알려진 장소인데,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폴 리비어 (Paul Revere, 1735.1.1~1818.5.10)는 원래 은 세공업을 하던 사업가로 당시 그가 사용하던 침실과 거실, 식당 등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소장품으로는 목제 장식품과 고가구, 은 세공품 등이 있습니다. 입장료는 6달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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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비어 하우스가 있는 곳은 보스톤의 리틀 이탈리아인 노스 엔드 지역입니다.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가다 보면 지난번 제 보스톤 여행기에서 소개한 Giacomo's Boston North End 식당이 나옵니다. 저희는 오늘 여기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합니다. 옛날에는 저녁에만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점심에도 문을 열고 2층까지 확장해서 편안하게 식사를 즐겼습니다. 그래도, 대기는 필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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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식사 후에 힘을 내어, 다시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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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폴 리비어 몰 (Paul Revere Mall)이라는 공원이 나오는데, 폴 리비어 동상도 있습니다. 그 뒤로 다음에 방문해야 하는 올드 노스 교회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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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 12월 16일 저녁,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이 발생한 후, 1774년 6월, 영국은 보스톤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를 금지하며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을 통한 미국 식민지의 질서 유지를 시도하게 됩니다. 1765년에 영국 정부의 과세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비밀 과격 조직인 '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이 주도한 보스톤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은 당시 영국을 지지하던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1774년 9월, 영국의 강압적인 대응에 저항하기 위해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 1차 대륙회의가 열렸고, 매사추세츠 주 의회는 민병대 (Minuteman)를 설립했습니다. 1775년 4월 7일, 영국군의 이동 움직임을 눈치챈 자유의 아들들의 지도자 조셉 워렌 (Joseph Warren, 1741.6.11~1775.6.17)은 폴 리비어 (Paul Revere, 1735.1.1~1818.5.10)를 콩코드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 의회에 경고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은 보스톤에서 캠브리지로 가는 배를 타고 찰스 강을 건너 콩코드로 향했습니다.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 무기고에서 불법 무기를 압수하고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조셉 워렌은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를 체포하는 것이 영국군의 목적이라 생각하였고,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 (William Dawes, 1745.4.6~1799.2.25)에게 렉싱턴에 있는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에게 체포 위험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폴 리비어는 배를 타고 찰스 강을 건너 찰스 타운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며, 각 마을의 민병대에게 영국군이 오고 있음을 알렸으며, 윌리엄 도스 또한 보스톤에서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 캠브리지를 지나 렉싱턴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에게 경고를 들은 민병대 중 많은 인원이 말을 타고 영국군의 이동을 전달했습니다.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를 만난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는 영국군의 상황을 전했고, 영국군의 규모를 보았을 때 단순히 그들의 체포만이 목적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콩코드에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합니다.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뿐만 아니라 렉싱턴에서 만난 새뮤얼 프레스콧 (Samuel Prescott, 1751.8.19~1777)이 합류하여 콩코드로 출발하였고, 존 핸콕과 새뮤얼 아담스는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 2차 대륙회의를 위하여 필라델피아로 도피하였습니다. 콩코드로 향하던 3명은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폴 리비어는 영국군에게 잡혔다가 나중에 풀려났고, 윌리엄 도스는 다시 렉싱턴으로 도주하였으며, 새뮤얼 프레스콧만 콩코드에 도착하여 영국군의 이동을 성공적으로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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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새벽 5시경, 콩코드로 향하던 영국군은 렉싱턴 그린 (Lexington Green)에서 미국 민병대와 교전이 발생했는데, 이 교전이 이후 8년간 이어진 미국 독립전쟁의 실질적인 시작이었습니다. 영국군 700명, 렉싱턴 민병대 77명간의 이 교전에서 영국군은 1명 부상으로 끝났지만, 민병대는 8명 사망, 10명 부상이라는 피해를 입고, 콩코드로 후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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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에 콩코드에 도착한 영국군은 숨겨져 있던 대포 3문과 총탄, 그리고 전투 식량을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그 모습을 콩코드 외곽에서 목격한 민병대는 콩코드로 향했습니다. 9시 30분경, 노스 브리지 (North Bridge)에서 민병대와 영국군이 다시 충돌하여 교전이 벌어졌는데 400명의 콩코드 민병대가 주도권을 잡았고, 영국군은 12시경에 후퇴를 결정합니다. 보스톤으로 후퇴하는 도중에 영국군은 800명의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민병대도 약 4천명의 지원군이 합류하였습니다. 영국군은 보스톤으로 후퇴하면서 민병대의 게릴라 공격에 시달렸고, 결국 영국군은 73명 사망, 174명 부상, 53명 실종되었으며, 민병대는 49명 사망, 39명 부상, 5명 실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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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드 전투에서 민병대는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사기가 높아졌고, 영국의 무력 사용에 대한 무력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제 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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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드로 향했던 폴 리비어, 윌리엄 도스, 새뮤얼 프레스콧 중에서 폴 리비어는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는데, 이는 앞에서 잠시 설명했던 미국의 대표 시인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2.27~1882.3.24)가 1861년에 발표한 시 '폴 리비어의 말타기 (Paul Revere's Ride)'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제혁 업자 (가죽 무두질하는 사람)였던 윌리엄 도스 (William Dawes, 1745.4.6~1799.2.25)는 독립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하며 공을 세웠지만, 전쟁 후에는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원래 의사였던 새뮤얼 프레스콧 (Samuel Prescott, 1751.8.19~1777)은 성공적으로 콩코드에 영국군의 이동을 알리고, 독립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지만, 전쟁중 전사하면서 사람들에게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폴 리비어는 독립전쟁 중에는 연락병으로 복무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자신의 사업인 은세공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사업을 확장하여 크게 성공했으며, 그가 설립한 회사인 Revere Copper Company는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나무 판자로 덮여 있던 주의사당 돔을 1802년에 폴 리비어의 회사 (Revere Copper Company)가 구리로 덮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설명드렸습니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는 폴 리비어의 이야기를 그의 시를 통해 역사적인 사실은 부정확하지만,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폴 리비어의 업적을 과장하여 그를 우상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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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노스 교회로 가는 길에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는 분을 보았는데, 이 악기는 글라스 하모니카 (Glass Harmonica) 또는 아르모니카로 불리는데, 벤저민 프랭클린이 발명했습니다. 크기가 다른 유리 그릇들을 회전시키며,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독특한 악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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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올드 노스 교회 (Old North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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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시 '폴 리비어의 말타기 (Paul Revere's Ride)' 에도 나오듯이, 1775년 4월 18일 밤, 교회 관리인이었던 로버트 뉴만 (Robert Newman, 1752.3.20~1804.5.26)이 폴 리비어의 지시에 따라, 교회의 첨탑에서 찰스 타운에 있는 민병대에게 영국군이 이동한다는 신호를 보낸 역사적 의미가 있는 올드 노스 교회는 1723년에 지어진,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 교회 (Christ Church)라는 이름이었으며, 첨탑까지의 높이는 53m입니다. 그런데, 1775년 4월 18일 밤에 첨탑에 올라간 사람은 로버트 뉴만 혼자가 아니라 교구 위원이었던 존 풀링 (John Pulling)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첨탑 밑에서 망을 보던 사람도 있었다네요. 이들이 첨탑에서 불을 밝힌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았지만, 찰스 타운에 있는 민병대는 이 불빛을 보았고, 영국군들은 보지 못 했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폴 리비어, 윌리엄 도스, 새뮤얼 프레스콧 뿐만 아니라, 찰스타운에서 불빛을 본 민병대와 소식을 들은 민병대들도 영국군의 이동을 전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존 풀링과 밑에서 망을 보던 사람도 윌리엄 도스, 새뮤얼 프레스콧처럼 일반 사람들에게 잊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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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부를 구경하려면 입장료 10달러를 내야 하며, 종의 방 (Bell Chamber) 또는 지하실 (Crypt) 가이드 투어를 하려면 추가로 5달러를 내야 합니다. 올드 노스 교회의 지하실에는 37개의 무덤에 약 1,100구의 시신이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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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마당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메모리얼 (Iraq-Afghanistan Memorial)이 있는데, 수많은 군인 인식표 (속칭, 개목걸이 (Dog Tag))가 걸려 있어 엄숙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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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메모리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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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콥스 힐 묘지 (Copps Hill Burying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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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에 설립된 식민지 시대의 묘지로, 보스톤에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의 묘지 중 가장 큰 곳이며, 1630년에 생긴 킹스 채플 묘지에 이어 보스톤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묘지입니다. 보스톤 만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해 있는 이 묘지는 보스톤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묘지였으나, 독립전쟁 때는 영국군이 찰스타운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포대를 쌓고 진지를 구축하여, 1775년 6월 17일에 벌어진 벙커힐 전투 때 여기서 건너편의 찰스타운으로 대포를 쏘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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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 있는 묘비 중에는 손상된 묘비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다니엘 말콤 (Daniel Malcom, 1725~1769.1023)의 묘비는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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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선장이며 밀수업자였던 다니엘 말콤은 타운센드 법이 통과된 후, 영국 제품 불매운동의 주동자 중 한명인데, 와인 60통을 밀수한 사건으로 유명했으며, 존 핸콕의 배가 영국 세관원들에 의해 수색당한 사실을 폭로하는 등 영국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는데, 그는 총알이 닿지 않는 3m 깊이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했을 때, 그의 묘비를 과녁 삼아 사격 연습을 했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는 그때의 총알 자국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 있는 그의 부인 묘비에서도 총알 자국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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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트레일의 마지막 코스인 15번째 사적지인 USS 콘스티튜션 (Constitution) 호와 16번째 사적지인 벙커 힐 기념탑 (Bunker Hill Monument)은 찰스 강 너머의 찰스타운 (Charlestown)에 있습니다. 찰스타운으로 가기 위해서는 빌 러셀 다리 (Bill Russel Bridge)를 건너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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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러셀 다리 (Bill Russel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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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넌 후, USS 콘스티튜션 호로 가는 길에 폴 리비어가 배를 타고 찰스 강을 건너 찰스타운에 도착한 지점을 기념하는 곳 (Paul Revere Midnight Ride Landing Site - Google 지도)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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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USS 콘스티튜션 (Constitution)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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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지시로 보스톤에서 1797년에 완성되어 1798년에 첫항해를 한 USS 콘스티튜션 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함으로 지금도 실제 항해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1812년 영미전쟁 중, 영국 해군 함대와 벌인 수차례의 해전에서 승리한 전적을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목조선임에도 불구하고 'Old Ironsides (철벽)'라고 불리는 이유는 수많은 포탄을 맞으면서도 침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미전쟁 200주년이었던 2012년에도 영미전쟁에서의 활약을 기념하기 위한 항해를 했습니다. 전체 길이는 93m이며, 본체 길이는 63m, 가장 큰 돛대의 높이는 갑판에서 52.4m입니다. 보안 검사 후, 무료로 배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데, 보안 검사할 때 18세 이상은 신분증이 꼭 필요하니, 여권을 꼭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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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콘스티튜션 호는 보스톤 해군 조선소 (Boston Naval Shipyard)에 정박되어 있는데, 1801년에 세워진 이 조선소는 예전에 해군 기지로 사용된 후 군용선 조선소와 해군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1974년에 국립역사공원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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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모습으로 지금과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매년 위치를 바꾼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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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콘스티튜션 호 맞은편에는 1943년에 만들어진 USS 카신 영 (Cassin Young) 호가 정박해 있는데, 이 배도 무료로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USS 카신 영 호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7번의 태평양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954년에 세계 일주 항해를 하는 도중, 한국 전쟁이 끝난 한국 바다 순찰이라는 임무도 수행했습니다. 1960년에 퇴역하였는데, 이후 국립공원관리청 (National Park Service, NPS)이 영구 대여하면서 이 곳 보스톤 국립역사공원에 보존하게 되었으며, 1981년부터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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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신 영 (Cassin Young, 1894.3.6~1942.11.13)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Attack on Pearl Harbor, 1941.12.7) 당시 USS 베스탈 (Vestal) 호의 함장이었는데, 같이 있던 USS 아리조나 (Arizona) 호가 침몰하면서, USS 베스탈 호 또한 침몰할 위기였으나, 카신 영 함장의 신속한 결단으로 이동하였기에 침몰하지 않았으며, 1942년 11월 9일, USS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호의 함장이 되어, 과달카날 해전 (Naval Battle of Guadalcanal)에 참전하였으나, 1942년 11월 13일, 일본의 포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현재, 하와이 오아후에 있는 진주만 국립 기념관을 방문하면, 침몰한 USS 아리조나 호의 위에 있는 기념관도 방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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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자리한 USS 콘스티튜션 호 박물관 (USS Constitution Museum)을 방문하면, USS 콘스티튜션 호의 역사와 선원들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는데, 입장료는 15달러이며, 기부금 입장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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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프리덤 트레일의 마지막 코스인 벙커 힐 기념탑 (Bunker Hill Monument)을 향해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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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환영해'라는 반말이 쓰여 있네요. 보통 '환영' 또는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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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벙커 힐 기념탑 (Bunker Hill Mon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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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에는 높이가 67m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념탑이 있는데, 탑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보스톤 시내와 캠브리지 등을 볼 수 있습니다. 1775년 6월 17일에 벌어진 독립전쟁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으며, 미국 대륙군으로 처음 전투였던 벙커 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825년부터 1843년까지 18년에 걸쳐 건축된 오벨리스크 형식의 기념탑 내부는 294개의 계단으로 전망대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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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 전투가 있었던 이 곳은 실제 브리즈 힐 (Breed's Hill)이라는 곳이었고, 벙커 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영국군은 이 곳이 벙커 힐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벙커 힐 전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륙군은 이 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총탄이 모두 떨어지는 최후까지 싸운 다음에서야 후퇴했다고 합니다. 약 2시간 동안의 전투 결과, 3,000명의 영국군 중 1,05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2,400명의 미국 대륙군은 약 450명의 사상자만 냈습니다. 영국군에게 점령된 브리즈 힐 지역은 1776년 3월에 다시 대륙군에게 탈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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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 기념탑 앞에는 윌리엄 프레스콧 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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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레스콧 (William Prescott, 1726.2.20~1795.10.13) 대령은 벙커 힐 전투에서 대륙군을 이끈 장교인데, 프렌치-인디언 전쟁에는 영국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전적이 있으며, 독립전쟁에서는 대륙군 장교로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조지 워싱턴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는 영국군으로 참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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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 기념탑 전망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벙커 힐 롯지 (Bunker Hill Lodge)로 들어가야 합니다. 프리덤 트레일은 벙커 힐 롯지 앞에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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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앉아있는 사람들 위에 있는 명판을 보면, 이 곳이 브리즈 힐 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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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 롯지 안에는 조셉 워렌의 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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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셉 워렌 (Joseph Warren, 1741.6.11~1775.6.17)의 원래 직업은 의사였는데, '자유의 아들들'의 지도자이며, 매사추세츠 주 의회 의장으로 미국 독립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1775년 6월에 제 2차 대륙회의에서 대륙군 소장으로 임관했지만, 벙커 힐 전투에서 윌리엄 프레스콧 대령 등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전투 경험이 많은 윌리엄 프레스콧 대령 등에게 지휘관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병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영국군의 이동을 알리기 위해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를 렉싱턴으로 보낸 인물이 바로 조셉 워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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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개의 계단을 올라, 벙커 힐 기념탑 전망대에 오르면 작은 창을 통해 아래와 같은 전망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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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지나온 보스톤 해군 조선소와 찰스 강 너머의 노스 엔드 지역이 보입니다. 물론, USS 콘스티튜션 호와 USS 카신 영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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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창을 통해서는 보스톤 다운타운과 캠브리지 지역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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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전망을 충분히 즐긴 후, 아래로 내려와 벙커 힐 박물관 (Bunker Hill Museum)을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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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힐 전투에 대한 자료도 잘 전시되어 있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입장은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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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프리덤 트레일을 다 마쳤습니다. 저희는 10시 10분부터 시작하여 4시 30분에 끝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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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인 Community College로 가거나, 아까 지나온 보스톤 해군 조선소에 있는 페리 터미널로 가서 페리를 타고 뉴잉글랜드 수족관이 있는 롱 와프 (Long Wharf) 지역으로 가시면 됩니다. 만약, 페리를 타고 롱 와프 지역으로 가실 예정이라면, 맨처음 소개한 프리덤 트레일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다리를 건너서 벙커 힐 기념탑을 먼저 방문하고, USS 콘스티튜션 호가 있는 보스톤 해군 조선소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면 동선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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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제가 쓴 글들을 읽고 여행 일정을 참고하시고, 추가로 보스톤 미술관과 하버드 미술관을 방문하시는 2박이나 3박 일정을 하시면 좋겠네요. 시간 여유가 더 있다면, 고래 투어도 적극 권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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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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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여디가 네이버 카페 원문을 읽고 정리한 요약입니다. 전문과 댓글은 원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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